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문단 편집) == 배경 ==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거쳐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시작했다. 여기에 큰 위협을 느낀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 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근근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475년 9월 장수왕은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하고,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함으로서 비로소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백제는 크게 약화되었고, [[대가야]]에게 [[전라도]] 동부를 빼앗기기까지 하는 등 내외부로 혼란기를 거쳤지만 [[동성왕]]과 [[무령왕]]대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성왕(백제)|성왕]] 대에는 슬슬 고구려에 반격이 가능한 국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문자명왕]] 말기로 계속된 나제동맹의 압박으로 인해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다 [[안장왕]] 즉위 이후 양면 외교 정책과 북위의 용성을 공격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이후 본격적으로 백제와의 전선에 집중해 다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일시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즈음 백제는 전투를 위해 파병된 군대가 안장왕이 친정한 고구려군에 연달아 패배하고 큰 피해를 입는 등 꽤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안장왕의 승하 이후, 545년 중부인의 추군파와 소부인의 세군파가 각각 자기 계파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려고 내전을 벌이게 됨으로써 고구려의 국력이 타격을 입고 쇠락하게 되었다. 북진 직전에 일어난 548년의 [[독성산성 전투]] 때는 가야의 사주로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에 쳐들어갔지만 신라군이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고구려군이 대패를 당하는 등 나제동맹이 굳건하게 실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